승차권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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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죽어라고 다녔다. 20대의 엄청난 시간을 기차와 버스에서 보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 회합에 가기 위해, 한 달에 적어도 몇 번은 버스를 탔고, 기차를 탔다. 버스비와 기차비를 다 모으면 어림잡아봐도 중고 소형차 하나는 너끈히 사고도 남을 것이 분명하다. 서울로 대구로 경기도로 전주로 부산으로 그리고 작은 도시들까지. 그렇게 다니면서 정말로 많은 분들과 만났고, 그 분들과 넘치게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신앙인에서부터 환경운동가, 학교 선후배. 그 많은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너무나 분에 넘치게 많은 것을 배웠다.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법과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 그리고 가장 중요한 세상을 사는 방법을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됐다. 소형차 사는 돈으로는 절대 배울 수 없는 것을 거의 공짜로 배울 수 있었다. 그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움의 말씀을 전해드린다. 그 분들이 안 계셨다면, 나 역시 오늘 같은 생각을 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고, 세상을 넓게 바라볼 수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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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마살인것일까 스스로에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연구실에서 같은 돈을 받고 살아가는데, 어떻게 남들은 기숙사비, 등록금, 생활비 다 내고도 남아서 카메라도 사고 차도 사고 그러는지 신기하기만 했다. 그래서 내가 도데체 돈을 어디에 쓰는지 알고 싶었다. 어디 다닐때마다 버스표와 기차표를 모아봤다. 대충 2008년부터 모은 것 같은데, 2008년 부터는 그래도 좀 덜 다니고 논문에 집중할 즈음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모은 표를 한번 세어보니, 164장. 2008년부터 2010년 중반이 넘은 오늘까지 대략 130주 정도 되는데. 2주에 한번은 기차나 버스를 탔다는 이야기다. 어딜 그렇게 많이도 싸돌아 다녔던지, 지금 생각해 보면 웃긴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밖으로 밖으로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눈다.

예전에 어머니께서 절대 외박은 하지 말라고, 외박만큼 안 좋은 습관도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때도 대학교 때도 친구집에서 자고 그랬기에, 그 말씀을 안 지킨다고 나를 혼을 내거나 그러시지 않으셨다. 항상 내가 원하는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기 때문에, 집에 있으면서도 속박을 받는단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그런데 대학원에 올라오면서부터는 수능끝난 고3 마냥, 속박에서 벗어난 망아지마냥, 그렇게도 외박을 많이 한 것 같다. 친구 집에서 선배집에서 그리고 이런저런 회합에서. 하지만 그 수 많은 외박 덕분에 어찌보면, 부모님과 똑같이 닮은 판박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장점과 만났던 많은 분들의 장점을 동시에 닮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떨어진게 아닌가 복에 겨운 생각을 해본다.

맹모삼천지교라고 사람은 환경이 젤 중요한 것 같다. 나를 어디에 놓아두느냐가 나를 어떻게 만드느냐에 큰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런 걸 생각해보면, 나는 짬뽕같은 사람이 된 것 같기도 하다. :)


ps.
이 승차권 한장 한장에 담긴 추억을 풀어놓자면 끝도 없을 텐데. 언젠가는 하나 하나씩 이 블로그에서 이야기 하면서 흘러 나오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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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6
  1. Favicon of http://minimonk.net BlogIcon 구차니 2010.08.21 2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음.. 그래도 그 가격으로 여행을 하셨으니
    여행할 돈을 모아 차만 사고 여행도 못가는것 보단 낫잖아요 ㅋㅋ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8.22 23:56 신고 address edit & del

      역시 구차니님... 우문현답이십니다 ^^
      듣고 보니, 정말 차만 사고 여행을 못 가는것 보단 훨씬 즐거운 삶을 살았네요. ㅎㅎㅎ

  2. 한보라 2010.09.02 23: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뜨아. 2년 가까이 164장을 일일이 모은 너의 "집요함"이 경이롭다.
    내 경우는 비행기 탄 횟수를 마일리지로 측정하지. 근데 너처럼 나열하면 비행기 타려고 공항에서 보낸시간 (낮과 밤)이 떠올라서 무지 억울할듯.
    "하지만 그 수 많은 외박 덕분에 어찌보면, 부모님과 똑같이 닮은 판박이가 아니라, 부모님의 장점과 만났던 많은 분들의 장점을 동시에 닮을 수 있는 기회가 내게 떨어진게 아닌가 복에 겨운 생각을 해본다."
    두번 찬성:) 하지만 외박은 자제해야 한다는 어머니 지론에도 한표:)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9.12 22:53 신고 address edit & del

      세상에는 서로 상반된 이야기인듯 하면서도 같은 뜻을 가진 이야기들이 있는것 같네. 참 신기하지. 그런걸 보면, 세상은 논리만으로 생각할 수 없는 뭔가가 있는것 같아

  3. Favicon of http://maehongi.tistory.com BlogIcon maehongi。 2011.06.07 12: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세상에..... 저 많은 것들을 모으느라 걸린 그 시간들이 놀랍네요!!
    저는 여행다녀온 다음날 빨래하면서, 가방 정리하면서 저런 승차권 하나 하나 다 찢어서 버렸었는데...ㅋ
    사소한 것이지만 꾸준히 수집했던 것이 이렇게 포스팅 글감으로도 나올수 있군요!!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1.10.11 10:29 신고 address edit & del

      하하.
      이 글 하나 써 보겠다고 모으고 모았지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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