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위청구논문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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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전만 하더라도 이런게 있는지도 몰랐는데, 대학원 생활에 젖어들면서 이 세상에만 존재하는 몇몇 "용어"를 배우게 된다. 배우게 된다기보단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정말 이 동네에서만 쓰는 말인데, 이 단어를 써야만 내가 어떻게 하면 졸업을 할 수 있다고 설명을 할 수가 있는데. 당연한 것이겠지만, 이 동네를 벗어나서 만난 많은 사람들에게 이 단어를 설명하기도 힘들뿐더러, 그 단어 속에 담겨 있는 의미와 그 단어가 정신과 육체에 가져올 압박감을 이해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느 분야가 그렇지 않는 곳이 있겠냐만.

어쨌든 내가 졸업하는 것을 가장 가슴졸이며 기다리고 계셨던 부모님께조차도 이걸 잘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졸업을 하려면, 3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내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다면서, 지금 내 진행상황을 말씀드리곤 했다.

그 1단계는 원래 이름은 학위논문계획서 구두시험인데, 사실 아무도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없고, 다들 프로포절이라고 하는거였다. 이제 앞으로 내가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하니, 이 연구를 하는데 필요한 조언을 좀 해 주십시오.. 이 정도인데. 물론 달랑 아이디어만 가지고 한 10분 떠드는 정도는 아니고, 적어도 기본적인 실험결과 정도는 가지고 자기 아이디어가 할 만하다는 것을 잘 "세일즈"를 하는 자리다. 사실 이 때 부터가 (학위)논문의 시작이라고 할 수가 있는데. 교수님 다섯분 앞에서 어리바리 대학원생이 다른 사람의 논문도 아닌, *자기* 논문을 가지고 이야기 한다는 자체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다. 자기 아이디어에 대해 그 누구도 책임지지 않기 때문에, 이제 자기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는 거다.

이 프로포절을 한게, 2008년 11월 28일인가... 하도 오래되서 기억도 잘 안 난다. 그 날, 같은 지도교수님 밑에 박사과정학생들 네명이 프로포절을 했는데. 내가 첫번째였나보다. 그렇게 프로포절은 무사히 잘 끝났다.

2단계가 사실 가장 큰 문제인데. 해외 저널에 논문이 되는 것이다. 우리 과에선 졸업을 하려면, 졸업연구주제를 가지고 해외 저널에 논문을 내서 되야 졸업을 시켜주는데. 이 과정을 설명하는 것이 사실 가장 고역이다. 뭔 놈의 논문이 그리 많은지. 나나 이 동네 사람들이야 이제는 워낙 익숙한 일이 되서, 어떤 문맥에서 논문이라고 할 때, 그 논문이 무슨 논문인지 빤하게 아는데. 여기서 조금만 벗어나면 모르는게 당연한거다. 그리고 불행한 일이지만, 모든 단어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이걸 적절한 우리말로 바꿔서 쉽게 설명하는데 진땀을 뺐다. 해외 저널이라는것도, 저널이 무슨 시사저널같이 그냥 잡지같이 들릴게 뻔한데. 사실은 (아무도 그렇게 안 부르지만) 해외학술지라는 건데. 잡지는 잡지인데, 논문만 실려 있는 잡지 정도랄까.

이렇게 해외 학술지라는걸 잘 설명하고 나서, 어떻게 저널에 논문을 내는지 그 과정을 설명하는건 또 다른 문제다. 리젝이니, 마이너 리비젼이니, 메이져 리비젼이니, 컨디셔널 억셉이니, 억셉같은 아주 생소한, 그러나 나한테는 아주 익숙한 말을 설명해야 한다. 논문을 내서 리뷰(심사)를 받으면, 그 리뷰어(심사하는 사람)이 논문을 읽고 그 논문이 저널에 실릴만한지, 부족한 건 없는지, 잘못된 건 없는지, 잘 살펴봐서 그 결과를 알려주는데. 그때 저 말들이 쓰인다.

이건 도저히 안 되겠으니, 다시 쓰던지 포기해라고 하는게 리젝(reject)이고, 이거 받으면 엄청난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온다. 누구는 몇 달 동안 소위 말하는 개고생하면서, 우리말도 아닌 영어로 썼는데. 다시 되돌아볼 일고의 가치도 없다는 평가를 받으니, 이게 도데체 리뷰어가 아주 속된 말로 병신인가, 아니면 내가 병신인가를 곰곰히 생각해 보게 한다. 그 다음이 리비젼(revision)인데, 내용이 좀 모자라니 또는 이해가 안 되니까, 다시 고쳐서 보내봐라 정도다. 보통 들으면, 이 단계도 아주 안 좋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보통 논문 내면 정말 대단한 - outstanding - 한 논문이 아닌 이상, 예의상으로라도 리비젼이 온다. 이게 심각한 정도에 따라 메이져 리비젼이니 마이너 리비젼이니 하는데, 크게 두 개의 차이는 없는 것 같다. 뭐가 되든 고쳐서 내긴 해야 하니까. 그리고 젤 기분 좋은 억셉(accept)이 있는데, 그 논문 우리 저널에 실어주겠다, 즉 합격이다. 가끔씩 이거만 고치면 논문 실어줄게, 하면서 컨디셔널 억셉도 있는가본다. 리비젼이랑 비슷한 것 같다.

이렇게 글로 써도 복잡한데, 이거 정말 그림으로라도 그려서 보여드려야 하나 싶을 정도로 다른 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싶긴 하다. 그만큼 이 과정이 지루하고, 스트레스로 꽉 차있기 때문에, 내 고생을 이해시키고 싶어서 그런거겠지.

3단계가 바로 학위청구논문심사다. 물론 아무도 이 이름 이대로 부르는 사람은 없고, 디펜스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한 내용을 가지고 또 다시 그 다섯분의 교수님들 앞에서 설명을 하는 자리다. 디펜스라고 부르는 이유야 빤하다. 교수님들이 공격을 하면, 그걸 잘 받아내야 하는데. 아무리 박사학위논문이라지만, 어떤 연구에서든 구멍이 없는 것은 없다. 그 구멍이 얼마나 크냐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그 학생이 그 구멍에도 불구하고 나름 박사 받을 만큼 열심히 했느냐가 문제인데. 이건 이제 "논리"의 영역에서 벗어난 문제라, 딱히 절대적인 기준을 세울수는 없는 것 같다. 그냥 발표를 들어보면, 이건 박사 논문 할 만큼의 일이다, 아니다를 느끼시는 것 같다. 어느 분야든 몇십년씩하다보면, 그냥 어림짐작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프로포절 한지 1년 5개월만에 나도 디펜스란걸 했는데. 분명 발표자료를 만들면 적어도 대여섯번은 고쳐야 한다는 것을 빤하게 알고 있기에 사실 시작하기가 두려웠다. 디펜스만 하면 모든게 끝이다는 것을 확실히 알지만, 그건 그거고. 당장 수십장의 발표자료를 만들고, 스크립트를 쓰고, 예행연습을 하고, 다시 발표자료를 고치는 무한 반복. 차라리 모르면 그냥 들이대서 닥치는대로 할 텐데. 이걸 알고 시작하려니, 겁부터 난다.

랩에서 먼저 졸업한 형의 말처럼, 시간별로 발표자료 스냅샷이 나올 거라고 하시더니, 정말 발표가 가까와질수록 이런 과정이 더 빨리 일어나기 시작한다. 발표 사흘전에 한번 왕창 고치고, 발표 이틀전에 다시 한번 왕창고치고, 발표 2시간에 전에 다시 고치고. 발표자료는 발표 1시간 전에 뽑고.

교수님들 앞에서 속소포 쏘듯이 말을 쏟아내고, 질문을 받아 답을 하고,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식은땀 흘리고,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그렇게 한 시간 가량 디펜스를 하고 나서, 교수님들끼리 논문 심사평을 정리하는 동안, 밖에 나와 있으면. 그 기분이란게 참 묘하다. 며칠을 제대로 못자서 피곤하기도 하고 하루종일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픈데 머리는 한시간동안 갑자기 너무 많은 것을 쏟아내서 이상한 상태이고. 그런데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분명 들어야 할텐데. 그런 생각조차 하기에 정신이 나간 것인가...

양희은 아줌마가 부른 봉우리란 노래가 있다.
사람들은 손을 들어 가리키지
높고 뾰족한 봉우리만을 골라서

내가 전에 올라가봤던
작은 봉우리 얘기 해 줄까?

봉우리...
지금은 그냥 아주 작은 동산일 뿐이지만
그래도 그때 난 그보다 더 큰 다른 산이 있다고 생각진 않았어
나한테는 그게 전부였거든...

혼자였지
난 내가 아는 제일 높은 봉우리를 향해 오르고 있었던 거야
너무 높이 올라온 것일까?
너무 멀리 떠나온 것일까?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잊어버려! 일단 무조건 올라 보는 거야
봉우리에 올라가서 손을 흔드는 거야
고함도 치면서
지금 힘든 것은 아무 것도 아냐
저 위 제일 높은 봉우리에서 늘어지게 한 숨 잘텐데 뭐...

허나 내가 오른 곳은 그저 고갯 마루였을 뿐...
길은 다시 다른 봉우리로
거기 부러진 나무 등걸에 걸터 앉아서 나는 봤지
낮은 데로만 흘러 고인..
바다......
작은 배들이 연기 뿜으며 가고

이봐 고갯마루에 먼저 오르더라도
뒤돌아서서 고함치거나 손을 흔들어 댈 필요는 없어
난 바람에 나부끼는 자네 옷자락을
멀리서도 똑똑히 알아볼 수 있을 테니까 말야
또 그렇다고 괜히 허전해 하면서
주저 앉아서 땀이나 닦고 그러지는 마!
땀이야 지나가는 바람이 식혀 주겠지 뭐
혹시라도 어쩌다가 아픔 같은 것이 저며올 때는
그럴땐 바다를 생각해
바다...
봉우리란 그저 넘어가는 고갯마루일 뿐이라구...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바로
지금 여긴지도 몰라
우리 땀 흘리며 가는 여기 숲속에 좁게 난 길
높은 곳엔 봉우리는 없는 지도 몰라

그래 친구여 바로 여긴지도 몰라
우리가 오를 봉우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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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6
  1. bola 2010.05.07 03:1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ah, i know the song. it's a lovely song but you can appreciate it only in your 30s:)

    btw, got the digital camera, a cute and cheap one.

    pat yourself on the back for hanging in there through the whole process you described. congratulate yourself for "gyun- dee- uh-naem."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5.09 22:06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다. 근데, 젤 마지막에 우리말로 쓴거 그거 무슨 말이고?

  2. 한보라 2010.05.11 05: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드디어 한타 가능.

    마지막 말은, [과정을]"견디어냄."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5.11 10:31 신고 address edit & del

      ㅎㅎㅎ 어째 우리말이 더 어렵노...
      어쨌든 고마우이.
      견디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시간은 흘러가더라.
      도망가지만 않으면 끝나긴 끝나는가보네.

  3. 한보라 2010.05.13 02: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야 . . . "도망가지만 않으면 끝나긴 끝나는가보네." 이달의 명언이다. 근데 그 도망가지 않기가 정말 힘들거든. 일이든, 공부든. 나에게는 도망가지 않는게 곧 견디어냄:) 장.박.사.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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