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은 곰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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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생활의 최종 목표는 바로 '논문'이라는 녀석이다.

두꺼운 교과서만 다 알면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이 착각이라는 것을 느낄 때 부터가 바로 대학원 생활의 시작인 것 같다. 그리고 교과서는 이제 참고서일 뿐, 논문을 파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렇게 논문이라는 것을 읽으면서 시작한 석사,박사과정의 끝은 다시 논문을 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짧은 녀석은 서너장이지만, 대부분의 논문은 적어도 여덟장, 적지 않는 양이다. 2단으로 말끔하게 편집된 논문은 처음에는 신기함으로 다가오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지겨워지다가 나중에는 되려 경의로워 보인다. 그리고 처음에는 읽는 모든 논문이 다 대단해 보이고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존경스럽지만, 조금 경륜이 쌓이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발표된 논문인지 보게 되고 누가 썼는지를 보게 된다. 논문에도 급이 있다고 느껴질 때가 박사과정 들어와서 얼마 안 됐을 때 였던것 같다.

전산학 논문은, 그 중에서도 특히 시스템 전공 논문의 길이는 다른 과학 분야나 전산 다른 전공 논문과 비교해 유별나게 긴 편이다. 학술대회 (컨퍼런스,conference) 논문이 대략 8장 쯤되고, 좀 좋은 컨퍼런스 논문은 10장 넘는 것도 많다. 특히 SOSP 같은 별종 논문들은 글씨도 8포인트에 빡빡하게 10장 넘는 경우도 많아서 읽는 사람 짜증나게 하기도 한다. 물론 다 읽고 나면, 역시 이런 사람들과는 경쟁이 안 되구나 자괴감이 들기도 해서 더 읽기 싫어지기도 하지만...

시스템 논문들은 대부분 "말"을 잘 해야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같다. 기본적으로 시스템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구현이라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그 개노가다 코딩을 하고 나서야 실험을 할 수가 있고, 그 실험 결과를 분석할 수가 있다. 근데 문제는 다른 기초과학분야-특히 화학 생물-과는 달리 그 결과가 왜 그렇게 나왔는지를 꼼꼼하게 분석을 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골치 아픈 부분이다. 다른 분야에서는 실험만 제대로 해도 논문을 쓴다고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어찌된 일인지 시스템 논문은 실험을 해서 왜 그렇게 됐는지를 주저리주저리 말로 잘 풀어서 써야 겨우 인정을 해 준다. 그러다보니 논문의 길이는 한없이 늘어만 가고, 읽는 사람도, 논문 쓰는 사람도 힘들어진다. (거기다가 시스템 논문들은 경험을 중시해서 수식이 난무하는 이론을 매우 꺼리다보니 말로 더 길게 풀어서 쓰다보니 더 논문이 길어진다)

시스템이란 건 기본적으로 큰 편이다. 작게 조금만 해서 뭔가를 만들거나 성능을 높일 게 별로 없다. 있다손치더라도 이미 다른 사람이 다 해 먹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보니 새로운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시스템이란게 다른 분야와 연결된 것이 워낙 많다보니 알아야 할 지식도 많고 구현하기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잘 하기도 힘들고... 그래서 재미는 있으나 힘든 분야가 아닐까 싶다.

그러다보니 전산학 시스템 분야의 논문을 일년에 하나 쓰면 정말 열심히 하는 사람이라고 본다. 특히 학술지(저널, journal) 논문은 심사기간이 길어서 일년에 하나 쓰기도 매우 벅찬 게 사실이다. 거기다가 이 심사기간이라는게 재수라서 어떤 경우에는 몇 달만에 끝나기도 하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몇 년이 걸리기도 해서, 기다리는 사람의 피를 말린다.

이번에 내가 쓴 논문도 아이디어가 나온게 2008년 여름이었는데. 그걸로 박사논문 예비심사(proposal)을 한게 2008년 11월 29일. 그걸 바탕으로 논문을 써서 IEEE TC에 낸 게, 2009년 6월 말. 정말 운이 따랐는지, 2009년 9월에 첫 번째 수정요청(revision)이 왔다. 물론 Major revision이라고 해서 많이 고쳐서 논문을 다시 내야 하는 결정(decision)이 온 것이긴 하지만, 떨이지지(reject) 않은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그래서 다시 3개월 동안 고쳐서 다시 낸 것이 2009년 12월 10일. 그리고 2010년 2월 14일에 두 번째 수정요청, minor revision이 왔다. 다행이 minor revision은 고칠게 많이 없었고 꽤 쉽게 고쳐서 다시 보냈다. 그리고 2010년 3월 7일에 최종 논문을 보냈고, 11일에 accept 연락이 왔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대략 생각해봐도 거의 1년 9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지금 진행하고 있는 다른 논문은 2006년 2007년에 하던 것이니, 4년이 다 되가는 논문도 있다. 지겹기 그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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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은 곰국이다.
희한하게도 논문을 뒤집어 보면, 곰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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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형이 이렇게 붙여놓은 걸 보면서, 야~ 이거 진짜 맞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곰국은 푹 끓여야 충분히 그 속에 있는 것들이 우려져 나온다. 급하게 끓이려면 당연히 화학조미료를 쓰면 되지만, 정말 제대로 된, 몸에도 좋고 정신에도 좋은 음식을 위해서라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기다리는 것이 가장 빨리 곰국을 끓이는 방법이 아닐까 싶다.

논문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정말 천재들-파스칼이나 테슬라 같은 사람-이 아닌 이상, 충분한 시간은 논문이 만들어지는데 필수적인 요소인 것 같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혼자 생각하고 동료랑 이야기하고 다시 생각하고를 반복반복했을 때 드디어 논문이라는 열 페이지 남짓의 깔끔하게 정리된 뽀얀 곰국같은 모양이 나오는 것 같다.

이래서 기초학문이란게 어렵다고들 하는것이 아닐까. 기다리고 기다리고, 실패하면 다시 도전해야 하는 특성이 우리 한국 사람에겐 어색한 것이어서 아직 우리가 응용분야보다 기초학문에서 약점을 보이는 것이 아닐까 불편한 일반화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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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0 Comment 10
  1. Favicon of http://minimonk.net BlogIcon 구차니 2010.03.24 11:3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학부 졸업논문 쓰는것도 정말 힘들었는데
    석사/박사라니 어우 끔찍해요 ㅠ.ㅠ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3.24 13:14 신고 address edit & del

      하하하 구차니님도 논문에 당하셨군요. ㅋㅋ
      근데 이 것도 일이다 생각하고 하면, 시간 지나면 다 되긴 하네요.
      (그 시간이 길고 짧고가 사실 더 큰 문제긴 하지만.ㅎㅎ)

  2. 김태훈 2010.03.30 15: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에 '논문쓸때 필요한 도구' 읽으면서 여기 들렀던 기억이 있는데,
    또 글을 읽게 되네요...저도 참고로 전산학과 석사과정이에요..
    님은 박사과정 고년차?..이신거같은데.ㅎ 부럽군요.

    논문은 곰국....공감100%군요.ㅋ

    승승장구하시길..
    그럼..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3.31 10:34 신고 address edit & del

      후배님이시군요. 앞으로 가실 길이 멀 겁니다. 꾸준히 지치지 말고 좋은 논문 쓰시고 졸업하시길.

  3. BlogIcon ellen 2010.08.03 20: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이제 곰국을 끓이려 불을 지피는 중입니다.
    재밌는 글들, 유용한 정보들 잘 읽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08.04 17:11 신고 address edit & del

      아.. 고생스런 길을 이제 시작하시는군요.
      힘내세요! 건강 조심하시고요. 체력이 곧 논문의 quality랍니다.

  4. Favicon of http://halef.egloos.com BlogIcon halef 2010.11.30 15: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논문=곰국
    랩에서 뒤집혀진 논문인쇄 전단지 읽고 웃은 적이 있는데..^^
    여기서 이런 글을 보니 반가워서 몇자 적고 갑니다.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0.12.06 12:01 신고 address edit & del

      halef 님도 센스가 있으시네요~ ^^
      첨에 봤을 땐 정말 '피식~'하면서 웃었거든요.

  5. 2011.10.05 12:2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 저는 전자공학 전공자입니다. IEEE 에 논문 제출해서 운좋게 Minor revision이 되었는데, 논문 제출한 후 벌써 10일 가까이 지났음에도 아무런 통보가 안오네요. ED가 까먹은건지 게으른건지(이런것이라면 좋겠지만) 아니면 다시 생각을 바꾸어서 세밀하게 review 하고 reject 을 때리려고 준비하는건지 불안하군요.휴..ㅠ.ㅠ Minor revision인 경우 판정이 뒤집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겠죠? 제발...흑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11.10.11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저널의 경우는 minor revision 이라면 거의 예외없이 accept 될거에요. 제가 주변에서 봐 온 경험으로도 그렇고요..
      미리 축하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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