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위 오렌지" ㅋㅋ 를 들으면서 생각난 영어에 관한 짧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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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고등학교 시절 내가 영어 공부를 손에 놓지 않고 꾸역꾸역 계속 한 이유는 굉장히 간단햇습니다.
그 무렵 제 친구 하나가 미국에 이민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랑 만나려면 영어는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2.
고등학교 2학년에 처음으로 원어민 영어교사제도가 도입되었고, 일주일에 한번씩 영어 수업에 원어민 교사가 들어와서 수업을 했습니다. 이름이 Jonack 이라는 캐나다 출신 선생님이셨는데, 프리토킹 수업을 하다보면 항상 애들이 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 나라에서는 고등학교 제도가 우리나라처럼 이렇지 않죠? 고3 생활 같은 것도 없죠?"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이 매우 곤란해 할 질문이었는데 겁도 없이 짧은 영어실력으로 어렵게 어렵게 질문을 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답이 재치가 있었죠.
"저는 여러분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러 온 것이지, 우리 나라의 문화를 가르치러 온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이 재치있는 답을 듣고 다들 한편으론 섭섭해하면서도 문화를 가르치러 온 것은 아니란 선생님의 말에 수긍을 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영어를 배우면서, 영어는 말만 배우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같이 배우는 것이란 것을 조금씩 더 알게 되었습니다.

3.
제 주변에 '발음'을 무지 강조하시는 분들이 몇 분 계셨습니다.
물론 저도 발음이 좀 좋아봤으면 좋겠습니다. 경상도 억양과 발음은 우리 말의 발음조차도 다 구현해내지 못하거든요. 아직도 'ㅐ', 'ㅔ' 발음은 도저히 구별해서 발음할 수가 없습니다. ^^;; 그러다보니 영어 발음이 좋을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곳 카이스트에 와서 처음 만난 외국인 분은 Driss Azougagh라는 모로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자국어인 모로코말, 그리고 프랑스말이 모국어입니다. 그리고 영어는 그 전에도 하셨겠지만 한국에 오셔서 더 배우신 것이고요. 처음 그 분의 세미나를 들었을 때, 반도 못 알아들었습니다. 프랑스식 영어였던 것이죠. 억양도 굉장이 다릅니다. 한 예로 '-tion'으로 끝나는 말을 영어에선 '-션' 정도로 발음하는데, 프랑스말이 익숙하신 드리스씨께선 '-시옹'으로 발음을 하셔서 나중에 듣고서야 아... 이게 그 말이었구나 하고 알 수가 있었지요.
그 후에 해외학회나 외국 학자들의 세미나에서 가장 고난이도라는 인도식 영어를 비롯한 중국식 영어, 한국식 영어 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 영어 발음은 '미국식 영어'와는 다르지만 굉장히 유명한 분들입니다. 영어란 것은 그 분들의 지식을 전달해 주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것이지요.

4.
몇 년 전, 해외 학회에 처음 나가서 영어로 발표를 하나 하게 되었습니다.
발표자료를 만들고 할 말을 영어로 다 외웠습니다. ^^ 그러다가 어떤 영어 전공자 분과 놀다가 발표 준비 잘 했는지 보자고 하셔서, 잠깐 앞 부분 몇 문장을 외워봤습니다. '전~혀' 못 알아들으시더군요. ㅋㅋ
알아들으면 비정상입니다. 즉, 영어라고 해서 생활 영어만을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생활 영어는 쉽습니다. 단어만 알고 손짓 발짓 하면 다 통합니다. 다만 쪽팔리고 시간이 더 들 뿐이죠. 말이 영어지, 전공 분야로 들어오게 되면, 아무리 영어를 잘 하는 사람이라도 그 분야의 단어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알아듣지 못합니다.

5.
석사 논문을 제출한 후에 실험을 좀 더 해서 해외 학회지에 논문을 내기로 교수님과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 말로 된 석사 논문을 영어로 바꾸어 가서 교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첫 번째 드래프트 논문을 보시고 교수님께선,
"영어가 안 되네..."
라고 하시면서 많은 부분을 고쳐주셨습니다. 저도 고쳐주신 논문을 보고 다시 이리저리 뜯어고쳐서 두 번째 드래프트 논문을 가지고 교수님께 보여드렸습니다.
"야... 이건 영어의 문제가 아니네. 우리 말을 잘 못하는 거구만.."
하고 혀를 끌끌 차셨습니다. ^^;;;

논문의 구조 자체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죠. 영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영어는 단지 내 머리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일 뿐이지, 중요한 것은 그 논문의 내용이었습니다.
(물로 표현이 서툴면 논문의 진가가 그만큼 드러나기 힘들기에 영어를 열심히 하고 있긴 합니다. -_-)

6.
요즘 인수위의 사람들, 그리고 이경숙 아줌마께서 영어몰입교육이니, 어뤤지인지 하는 뻘소릴 하는 것을 들으면서 친구들과 엄청 웃었습니다. 발음이 좋아야 한다... 아마 그 분 외국 학자들을 많이 못 만나보셨나 봅니다. ㅋㅋ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언어는 다른 학문을 배우기 위한 도구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어는 다른 학문을 배우기 위한 도구일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실제로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더 잘 알고 있는 것이 발음 하나 더 고치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그러기에 도구 하나를 가지고 나라 전체의 계획을 세워야 할 인수위 사람들이 미주알고주알 캐내는 것은 앞으로 5년이 걱정되게 하는 일이네요. ㅠㅠ
(총선때는 제발 한나라당이 엿을 먹길...)

7.
우리 나라 사람이라면 우리 말을 제대로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또 자존심 지키기의 하나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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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back 2 Comment 7
  1. Favicon of http://closer0.tistory.com BlogIcon 바람새0~ 2008.02.01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ㅋㅋ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이경숙 아줌마는 어~륀지~도 아니라 오~륀지..라고 했다는데 그닥 발음도 좋은 것 같지 않은데,
    무식해서 그런지 학문적 깊이가 없어서 그런지 그런 얘기를 철판 깔고 잘도 하는 것 같습니다.

    숙대 못 가길 다행입니다.(전 남자라서;;)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08.02.01 22:54 신고 address edit & del

      오랜만에 길게 그림없이 글을 쓰니까, 역시 말이 계속 꼬이는군요. ㅎㅎ

      역시 글을 쓰는건 쉬운게 아닌듯. 계속 써봐야 늘겠는데.. 자주 글을 한번 써 봅시다. 그려.

      그나저나 바람새는 요즘 글 너무 많이 쓰던데.. 공부 안 하시나. ㅋㅋ

  2. Favicon of http://eileenme.tistory.com BlogIcon eileenme 2008.02.01 23: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장작가님^^
    제 블로그에 댓글과 트랙백을 걸어주고 가셔서 들렸답니다.
    장작가님 말씀처럼 영어는 우리가 살아가면 필요할수도 필요하지 않을수도 있는
    도구에 불과할 따름이지요. 도구란 사용자의 편의에 의해 본인에 맞게 사용하면
    되는것이 아닐런지... 도구를 사용함에 있어 어떠한 기준이 있고 방법이 있는것이
    아닐진데 국가를 운영하라는 자리에 있는 높으신?분들이 본인들의 주관적 잣대로
    실험을 하려는게 안타깝습니다.
    글들이 꽤 많네요,,,찬찬이 둘러보고 갈께요~
    즐거운 주말과 다가오는 설 잘보내시고 새배 복 듬뿍 받으세요!
    좋은글 읽으러 간간이 들릴께요^^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08.02.02 17:19 신고 address edit & del

      eileenme님 들러주셔서 고맙습니다.
      인수위의 영어 교육 해프닝이 그저 해프닝으로만 끝나길 바랄 뿐입니다. ㅠㅠ

      한 나라의 새로운 정부를 구성하는 사람들이 자존심이 있지.. 도구에 목숨 걸고 정책을 만드는 것이 기가 찰 노릇입니다.

  3. 사오마이 2008.02.22 15: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운하관련 글 보러 왔다가..글들이 너무 멋있어서 이곳 저곳 보고 갑니다..
    외국에 나와 살면서 과연 5년후에 여권갱신이 가능할런지 두려워 하며 살고 있답니다....
    외국어 영어...그게 뭐가 중요하다고....언어는 우리의 정신인데...
    이건 우리의 정신과 문화를 말살하고자 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
    외국어 하고 싶은 사람만 해도 나라 돌아가는데 아무 문제 없을 것인데...
    국제경쟁력하고도 아무 관계 없을 것인데 말이지요...

    • 혹시 중국 청도의 사오마이님이 아니신지?? 2008.03.06 13:00 신고 address edit & del

      제가 아는 분 별명과 같은데 저도 그분도 외국에 나와 살고 있거든요... 참고로 전 산입니다.

    • Favicon of http://5bpa.tistory.com BlogIcon 장작가 2008.03.06 13:21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습니다. 어줍잖은 글들인데, 칭찬해 주시니 몸둘바를 모르겠네요.

      언어에는 정신과 문화가 담겨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단순히 눈 앞에 보이는 반찬만 좋아지면 된다는 답답한 현실이 걱정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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